완화의료라는 용어는 임종의료와 구분없이 쓰이고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하면 둘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완화의료는 반드시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만 시행하는 치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온몸에 암세표가 전이되어 하루하루가 힘겨운 누가 보아도 임종이 눈앞에 닥친 사람에게만 완화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혈압, 당뇨, 중풍등 노년에 닥치는 온갖 만성 질환들의 후유증으로 신체의 정상적인 기능을 모두 잃고 침상생활을 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환자는 언제 임종이 올지 알기는 어렵지만 삶을 좀더 편안하게 해주는 치료는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정의하는 완화의료는 다음과 같다.
완화의료란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과 연관된 문제들을 겪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치료로 통증, 신체적 문제, 정신적 문제까지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히 평가함으로써 고통을 예방하고 덜어주는 방식을 의미한다.
완화의료는 구체적으로 다음을 의미한다.
*통증을 포함한 괴로운 증상을 해소시킨다.
*삶을 긍정함과 동시에 죽음이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인지한다.
*죽음을 서두르지도 방해하지도 않는다.
*환자 치료에서 심리적으로 영적인 면을 통합한다.
*환자가 사망전까지 가능한 한 능동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다.
*환자의 가족이 환자의 투병을 견디고 환자가 사망한 후 애도하는 것을 돕는다. 이런 시도는 여러 전문가들로 구성된 치료 팀이 관여하도록 한다.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임종이 임박한 경우 외에도 적극적인 치료와 함께 병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중에도 환자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완화치료를 적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죽음이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인지한다.”라는 내용이다. 이에 관련하여 최근 대두되는것이 ‘죽음의 의료화’ 논의다.
다음의 경우가 ‘죽음의 의료화’가 가져오는 전형적인 사례다.
92세 할아버지가 호흡곤란으로 저녁8시에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왔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큰 병치례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가 1년 전부터 서서히 기운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외출을 못하게 되었다.
5개월 전부터는 혼자서 화장실 출입도 못하게 되어 대소변을 받아내게 되었으나 식사는 혼자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요양병원으로 모시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할아버지가 거부했다. 할아버지을 모시고 있던 장남이 더 나빠지기 전까지 일단은 집에서 모시기로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한달 전부터 침상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게 되고 식사도 떠먹여주어야 하는 상태가 된 후에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집 아닌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했다.
병원에 오던 날 아침 할아버지가 약간 열이 있는78ㅕ7-듯하면서 횡설수설을 하다가 점점 의식이 나빠지면서 숨을 몰아쉬자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응급실에 들어온 할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할아버지’가 아닌 ‘환자’가 된다.
환자의 생태 징후를 측정한 간호사가 급히 의사를 호출하고 이어 달려온 의사가 뭐라뭐라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를 내뱉자 의료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할아버지에게 바늘을 꽂고 기계를 연결하고 수액을 매달고 피를 뽑는다. 거기에 보호자들이 설자리는 이미 없다. 어리둥절하고 경황이 없는 보호자들에게 한눈에 보기에도 경험이 많지 않은 듯한 젊은 의사가 피로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건다.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 지금까지 뭐하신 거예요?”
몇달동안 할아버지 곁을 지키며 대소변을 받아내고 고생한 보호자들은 순간 죄인이 된다.
“그렇게 안 좋으신가요? 어제까지는 식사도 그런대로 하시고 말씀도 하셨는데...”
“지금 검사지표가 너무 안 좋아요. 폐렴도 생긴것 같고 산소포화도가 너무 낮아서 이대로 두면 바로 돌아가실 것 같아요. 지금 곧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니까 그리 아세요.”
“........”
“어제까지 소변도 잘 안 나오지 않았나요? 신장기능도 엉망인데....”
“....”
“동시에 혈액투석도 해야 합니다.”
그때서야 가족들은 1년간 매일 보면서도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는다. 할아버지가 이제는 돌아가신다는 것을,,,, 부랴부랴 나머지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깨알 같은 글자가 박힌 서류들에 서명하느라 눈물을 흘릴 시간조차 없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는 이미 집에 있던 그 할아버지가 아니다.
기도에는 손가락만한 삽관이 들어가 있고 삽관을 고정하기 위해 얼굴은 반창고로 도배가 되어있다.
눈도 한번 더 못 맞추고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의 매정한 철문 뒤로 사라진다. 생각 외로 할아버지의 경과는 빨리 진행을 해서 몇시간이 지나 심장이 한번 멈추었다. 중환자실의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해서 다시 심장박동은 돌아왔지만 아까보다 더 험악한 표정의 또다른 의사가 나타나 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 가족들은 이제 희망보다는 빨리 끝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에 두번째 심정지가 왔을 때에는 30분 이상의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더이상 심장박동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새벽 4시 39분에 사망 선고된다. 환자가 사망후에나 가족들은 중환자실에 들어가 환자를 볼 특권이 생긴다. 병원에 들어온 지 12시간도 안되어 할아버지는 생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차가운 중환자실 침상에서 가족을 맞는다. 언제 달았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수액줄과 의료기기들을 때어내고 환자는 영안실로 옮겨진다.
이때 가족 중 한 사람은 뒤에 남아 퇴원수속을 밟아야 한다. 응급실 원무과 직원은 하품을 참으며 환자의 사위에게 121만원의 치료비가 찍힌 고지서를 건네준다. 사위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충격이지만 방금 받은 고지서도 못지않게 충격이다. “겨우 10시간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100만원이 넘는 치료비가 웬 말이냐?” 라고 따져보지만 이러이러 저러저러한 치료가 들어갔고 또 비싼 응급실 이용료까지 보태면 계산에 틀림은 없다.
옛날 같았다면 할아버지가 이제 돌아가시게 된다는 것을 옆에서 다들 알고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기술의 발달과 함께 마치 죽을 사람도 살려내는 것 같은 착시 효과가 생기면서 이제는 노화에 의한 자연사라는 만고의 진리가 무색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결국 쇠약해진 노인이 사망하는 맨 마지막 단계, 근력 약화에 의한 활동력 저하ㅡ>식이 섭취 부진 ㅡ>영양실조 및 탈수에 의한 장기기능 저하 ㅡ>인두근 약화에 의한 흡인과 폐렴 ㅡ>사망이라는 과정이 모두 처치가 가능한 질환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의료인들뿐 아니고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점점 더 복잡한 양상으로 변화했다. 사회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현대의학의 발달로 인간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예전 같았으면 죽었을 상황에서 얼마나 극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게 된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이러다가 나빠지면 병원에 모시고 가면 방법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한다.
의사들의 사망진단서에는 더이상 노환이 사망 원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심부전, 신부전, 폐렴, 감염증..... 모든 사망에는 의학적인 진단명이 붙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제 현대의학은 죽음의 속도와 시간, 장소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은 가족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장기 적출이 적절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맞춰야 하는 행사가 되어버렸다.
영화 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기로 한 것을 알게 된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기 위해 아버지에게 타인의 심장을 이식해 생명을 연장한다. 그 과정에서 거부 반응이 날 때마다 계속 새로운 심장을 얻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적 상상이지만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현실의 죽음은 점점 더 부자연스러운 사건이 되어가고 자연사에는 때로 안락사 내지는 살인과 혼동이 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서 인류 역사에서 생물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죽음이 이제는 의료의 실패로, 의료의 적으로 둔갑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식이라면 말기 질환에 시달리던 환자가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 의료인은 슬픔을 나누며 남은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병원에서 환자의 죽음은 어떤 경우든 일어나면 안되는 일종의 사고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환자가 사망하면 그 경위가 무었이었든 의료진은 우선 보호자에게 질택당할 일이 없었는지 먼저 살피고, 병원의 정기적인 사망집담회에서 동료 의사에게 비난받을 일은 없는지 살피고, 심지어는 사망 예가 병원 의시에게 비난받을 일은 없는지 살피고 심지어는 사망 예가 병원 평가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지까지 따져야 한다.
이런 시스템은 의사들이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는 일을 점점 어렵게 기피하게 만든다. 시간을 끄는 것이 환자는 물론 환자의 가족에게까지 고통스러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죽음을 늦추려는 시도를 하는 일도 흔히 보게 된다.